요괴생활 (A Bizarre Life) 최모민 Momin Choi 2021. 9 . 14 — 10 . 15 글_임진호 작가와의 대화는 보통 풍경에 대한 이야기에서 시작되었다. 일하고 그림 그리는 자기 자리에서 보이는 풍경, 집으로 가는 길, 홍제천 주변, 한 사람의 또는 한 세대의 주어진 자리로서 기호화되는 장소들, 그리고 늘 그곳에 있지만 빛에 따라, 계절에 따라, 노후화와 철거와 개발과 인간 세상의 풍파에 따라 조금씩 모습을 바꾸는 풍경에 대해. 그가 도시에 있을 때나 어느 시골의 작업실에서 그림을 그릴 때에도, 풍경은 늘 바로 그릴 수 있는 대상으로 거기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풍경은 순진한 객체인 채 눈앞에 놓여 있는 것만은 아니다. 사람들이 머무르다 떠나고, 사람들이 사고팔고, 사람들을 울고웃게 만드는 대지와 거리와 아파트와 건물들은 살아서 뚜벅뚜벅 움직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을 삼키고 뱉고 고갈시키며 빠르게 몸집을 불려 나간다. 풍경이 변화하는 맹렬한 속도는 그에 비해 너무나도 미미한 자신의 나아감에 무력함을 선사한다. 고향 집이라 부를 수 있을 아파트가 있던 자리에는 주상복합단지가 그 눈부신 파란 유리창 위로 향수를 튕겨낸다. 도시는 아무것도 쥐지 않고 태어난 이들을 그 풍경 바깥으로 열심히 뱉어낸다. 열심히 살면 나의 자리를 마련할 수 있을 것이란 보편적 확신은 사라지고 시키는 대로 따르는 것만으로는 그저 서서히 침몰해갈 뿐이라는 것을 알아버렸다. 그리고 여기저기서 떠들어대는 일확천금과 인생역전의 새로운 신화들이 또 다른 절박한 그림자를 드리운다. 그런 풍경 속에서 묵묵히 자기 자리를 지키며 산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숨 쉴 자리 하나 마련하는 것 자체가 별일이 되어 버렸다. 하물며 예술을 하며 산다는 것이란. 그림을 그리며 살아가는 것은 종종 그리는 삶과 생존하는 삶의 지독한 분열을 강요한다 (예술의 언저리에서 글을 쓰며 사는 것 또한 마찬가지다). 그래서인지 예술인의 삶은 마치 유령 사과 처럼 속이 텅 빈 껍데기인 채로 끝없이 확장해가는 도시 위에 매달려 있곤 한다. 최모민이 그리는 그림에서는 그러한 분열의 조짐들이 풍경을 점유한다. 다중적 시공간으로의 벌어진 틈으로, 그리고 여러 자아들로의 흩어짐으로. 머리를 감싸고 서성거리는 인물들의 풍경에서는 불안의 정서가 감지된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에서 적을 맞닥뜨릴지 모르는 팽팽한 긴장감에서 야기되는 불안이라기보다는, 서서히 삶을 분열시키지만 실재하지 않는 적의 형상을 한없이 기다려야만 하는 불안의 기시감에 가까울 것이다. 거기엔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낸 천적이 아닌 끝없는 다원성의 세계로 흩어져 버린 공정과 정의의 공허함이 있다. 실체가 없는 적 앞에서 낼 수 있는 용기라는 것은 망상에 가까운 것이다. 오늘의 젊은이들은 이생망이라는 염불을 외며, 살아있지만 기댈 수 있는 삶의 이유를 상실한 채,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삶을 나름의 방식으로 견뎌낼 뿐이다. 최모민이 지난 한해의 전시들에서 보여주었던 것들은 이와 같이 극단적 무기력에 짓눌린 인물과 도시의 풍경이었다. 벽과 계단과 난간에 늘어져 붙은 인물들 (계단에 사람들), 나뭇가지에 위태롭게 매달려 먼발치의 아파트 단지를 내려다 보는 사람 (매달리다 연작 6), 거미줄에 포획된 사람 (매달리다 연작 >, 벌거벗으며 늪으로 향하는 사람들 (늪에서 연작). 그러나 매달리고 걸려있고 늪을 바라보는 사람들에게서, 문득 도약하고 버티고 응시하는 듯한 모호한 반전의 틈을 감지할 수 있었다. 이번 전시에 등장하는 최모민의 ‘요괴들’에게는 무력한 태도 위로 분열의 징조가 더욱 선명하게 드리운다. 작가는 얼음으로 덮인 풍경 속에 얼음의 빛과 질감으로 자기 이미지를 그려넣었다 (얼음사람 만들기: 분신, 얼음사람). 머리를 감싸다가, 고개를 젖히다가, 손을 들어올리다가 순간 얼음으로 굳어버린 형상이다. 얼어붙은 (어쩌면 얼음으로 위장한) 인물들은 풍경 속으로 자연스럽게 스며든다. 작가는 그저 저기 보이는 풍경의 한 조각인 듯 차가운 거리를 두고 자신의 이미지를 다루었다. 마치 실체 없이 남겨진 얼음 껍데기처럼, 작가는 그려진 자기를 얼음 풍경 속에 덩그러니 남겨두었다. 이젤 앞에 서서 그림을 그리는 자기 위로 그림을 그리는 자기를 그리고 또 그리는 (자기 착취하는 남자: 작업실에서), 또 꽁꽁 얼어붙은 작업실 안에서 그림을 그리는 자기를 그린 (녹는 손) 에서는 분열된 작가의 시선이 다시 그 자신과 그가 처한 상황을 응시하기를 반복하는 자기지시적 풍경을 재현한다. 분열될수록 선명하게 드러나는 자신의 모습을 그려내는 일만큼 기이한 일이 어디에 있을까? 흩뿌려지는 현실 속에서 더욱 신실하게 존재하는 자신의 삶이야말로 요괴의 그것이 아니던가? 책이 빼곡하게 꽂힌 책장 옆으로 고가도로를 향해 난 창문이 그림처럼 걸려있다. 창문으로 들어온 바람에 커튼이 거세게 휘날린다. 머리를 괴고 누운 사람 머리 위로 바람이 지나간다 (웃는 남자). 커튼이 가만히 흔들린다. 누워있던 사람이 있던 자리가 텅 비었다 (거실에서). 커튼 뒤에서 두 팔이 뻗어 나왔다 (종이꽃). 커튼 뒤에 숨어 두 팔을 뻗은 사람을 그린 흑백의 드로잉이 있다 (거실에서 드로잉). 커튼을 흔드는 바람은 창 밖에서 방 안으로, 방 안에서 프레임 밖으로, 사람이 없는 방 안으로, 사람이 있는 목탄 드로잉으로 불어든다. 안과 밖의 풍경이 끊어질듯 이어지며 각기 다른 벽에 걸려있는 네 개의 그림을 넘나든다. 그림이 조금씩 내부와 외부의 한계선, 캔버스의 프레임을 뚫고 나와 이곳의 현실을 향해 열리는 것을 보며, 공허와 무력함 속에 분열되어가던 작가의 시선이 조금씩 그 바깥 어딘가를 향하고 있음을 조심스럽게 추측해본다. 지금 바로 우리 눈 앞에서 폭죽이 터지고 있다 (불꽃놀이). (종이꽃)의 커튼 뒤에 벌려진 두팔은 내부에서 외부를 향해 스스로의 존재를 확인하는 증거와도 같이 작동한다. 그 손을 떠나 바람에 흩날리는 종이조각들은 개구리로 변신한다. 장난같은 마법이지만 거기에는 분명 삶을 향한 나지막한 의지가 담겨있을 터이다. 장난은 현실의 육중한 공허함을 깃털처럼 날려버리는 진정한 생존의 마법이기 때문이다. 극단적 절망 속에서 공포와 호기심이 공존하는 새로운 존재 양태를 탐색하듯 최모민의 그림은 끊임없이 그가 포착한 풍경의 다중성을 갱신한다. 생각해본다면 분명 요괴의 삶은 분열된 현실에서 비롯되지만, 그 본질은 비현실이라는 점에서 꿈속의 삶과도 다를 바 없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요괴는 장자의 나비가 되어 날아갈 수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어쩌면 최모민의 얼음은 유령처럼 실체없이 존재하는 껍데기(구식 인간)의 삶이 아닌, 보호색으로 자신을 숨긴채 낯선 풍경 속을 살아갈 준비를 하는 새로운 요괴의 번데기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