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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 같은 삶: 최모민의 회화 속의 은밀한 악몽과 구원

 

 

   어둠이 내린 한강을 건너는 이 다리는 아직 공사 중이라 불그스름한 철골을 드러내고 있다. 비단 물리적 의미뿐 아니라 사회적 의미에서도, 최모민의 〈물세례〉(2019)의 배경을 뒤덮는 구조물은 거대한 무게를 암시한다. 그것은 평범한 개인의 관점에서 보면 엄청난 자본의 산물이며, 완성되고 나면 수많은 시민들의 삶을 떠받칠 것이다. 강 건너편에 펼쳐진 도시의 풍경은 작은 불빛들 하나하나마다 누군가의 삶을 담는다. 교량이 되어 가는 이 구조물은 많은 선들이 교차하는 철골처럼 복잡하고 견고한 현실의 일부다. 그러나 다른 한편, 그 아래에서 바라보이는 한강의 풍경은 비현실적이고 환상적이다. 다리의 붉은 뼈가 드러난 모습은 아이러니하게도 폐허를 닮았으며, 검푸른 하늘 아래에서 불빛으로 가득한 도시와 어우러져 기이한 정감을 빚어낸다. 그리고 비도 오지 않는데 강물이 범람하고 있다. 불길한 꿈처럼, 물은 강변에 있는 지극히 평범한 옷차림의 두 사람을 발목부터 천천히 삼키며 차오른다. 서 있는 여자가 앉아 있는 남자에게 기울인 생수병에서는 물리 법칙으로 설명할 수 없는 양의 물이 쏟아진다. 그녀가 이로써 그를 모욕하는지 정화하는지, 그들의 행위가 파국을 부추기는 것인지 물리치는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작가는 지난 수년간 현실과 비현실이 교차하는 이런 풍경을 파고들어 왔다.

   최모민의 첫 번째 개인전의 제목은 《익명의 풍경》(2017)이었고, 이 말은 그가 2015년에 그린 〈익명의 밤〉 연작에서 비롯되었다. 그의 작업실이 있었던 홍제천 부근의 밤을 그린 이 연작은, 천변 길이나 주택가 골목에서 짙은 어둠과 가로등 불빛이 부드럽게 섞이는, 인적 없는 적막한 풍경을 담는다. 그것은 불면을 피해 모두가 잠든 한밤중에 산책을 다녀 본 사람에게는 익숙한 장면이다. 한편으로, 어둠이 흔히 자아내는 두렵고 불안한 정서는 불면증을 유발하는 고민들로 가득한 막막한 앞길과 잘 어울린다. 다른 한편, 깊이 잠든 도시를 걸으면 꿈속을 헤매는 기분이 들고, 고독한 어둠은 나의 정체성을 서서히 지우면서 휴식과 위안을 준다. 작가는 이런 풍경을 가리켜 ‘익명’의 밤이라고 불렀다. 밤은 빈부 격차도 골목의 쓰레기도 어둠 속으로 가라앉히고, 사회가 정한 정체성을 잠재우며 모든 사람과 사물들을 평등한 익명의 존재로 만든다.

   그는 〈익명의 밤〉 이후 사회적, 일상적 공간(에 속하는 존재들)을 잠시나마 낯선 모습으로 변화시키는 다른 현상들로 눈을 돌린다. 가령, 〈제철의 남자 2〉(2018)는 하얀 눈으로 덮이고 늦은 오후의 태양에 금빛으로 물드는 풍경을 담는다. 〈생각하며 걷기〉(2019)의 시간적 배경은 ‘개와 늑대 사이’(entre chien et loup)라는 말이 떠오르는 황혼 녘이다. 그리고 시간대를 특정하기 어려운 다른 많은 작업에서도, 그는 선득한 공기, 창백한 빛, 푸르스름한 어둠과 같은 것들이 있는 장면을 능숙한 붓질로 표현한다. 최모민의 회화의 한 가지 특징은 이런 요소들에 의해 현실적 풍경에 은은히 더해지는 환상적 분위기다. 그것은 깊은 밤이나 개와 늑대 사이의 시간처럼, 미묘한 매력을 가지면서도 어딘가 차갑고 수상한 느낌을 머금는다.

   그의 회화가 갖는 다른 하나의 특징은 인물의 기이한 모습이다. 나는 그것을 두드러지게 보여 주는 〈돌이 된 남자 2〉(2017)라는 작업에 주목한다. 이 작업은 냇물 속(아마 홍제천일 것이다)에 박힌 큰 돌덩이와, 그 앞에서 생경하고 작위적인 모습으로 솟은 정체 모를 남자의 한쪽 다리를 보여 준다. 이것은 외견상 거칠고 무미건조한 그림이며, 최모민의 다른 작업들의 맥락 속에서 바라보지 않으면 영문을 알기 힘든 장면이다. 작가는 이 남자의 행위를 ‘위장술’이라고 부른다. 〈돌이 된 남자 2〉의 배경은 돌과 잡초밖에 없는 벌건 대낮의 천변이다. 그곳에는 초라한 현실을 가릴 수 있는 어떤 환상적인 요소도 없다. 그는 이런 ‘절박한’ 상황에서 자기 모습을 숨기려고 냇물 속에 드러눕는 극단적 선택을 한 것이다. 이 ‘슬랩스틱’은 우스꽝스러운 행위지만, 정말 우습기보다는 오히려 처연하다. 그의 경직된 다리는 익사한 시체처럼 보여 불길하기도 하지만, 이 ‘익명’의 남자는 물속에서 안도감을 느끼고 있는지도 모른다. 최모민이 그리는 풍경은 이런 인물(의 제스처)로 인해 비현실적 성격을 갖기도 한다.

   〈제철의 남자 2〉는 이런 두 가지 특징을 모두 선명히 드러내고 결합하며 그의 회화적 탐구를 한차례 매듭짓는 작업이다. 이 그림 속의 남자는 하얀 눈에 뒤덮여 있다. 아무도 없는 오후의 천변에 있는 그는 아마 직업이 없을 것이며,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주저앉은 모습을 보면 희망도 없을 것이다. 그는 눈이 상징하는 냉혹한 고통을 겪고 있거나, 혹은 절망에 빠져 기괴한 방식으로 자학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겨울에 반팔을 입고 눈을 뒤집어쓴 이 ‘제철’의 남자의 과장스런 제스처는 우스꽝스럽게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또 다르게 보면, 이 남자는 그를 덮어 주는 눈 속에 숨어서 위안을 받는 것 같고, 늦은 오후의 태양 아래에서 그의 고행은 주위의 적막한 풍경과 함께 환상적인 빛으로 물든다. 이 그림은 가만히 보면 기괴하고, 우스꽝스럽고, 환상적이다. 이런 느낌을 한 마디로 표현하려 하면, 전반적으로 평범한 사물과 풍경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이 작업의 인상을 고려할 때 다소 뜻밖인 말이 떠오른다. 즉, 작가는 ‘그로테스크’한 것들이 은밀히 녹아든 일상적 풍경을 그린다.(각주)

  0 세 번째 개인전 《식물 극장》(2019)에서 발표된 최근의 작업들에서, 그는 식물이 있는 풍경을 무대로 수행되는 ‘일인극’(그러나 구체적인 사건은 없다)을 보여 준다. 이전의 작업들 속의 얼굴 없는 인물이 풍경에 녹아드는 하나의 제스처나 실루엣에 머물렀던 것과 달리, 《식물 극장》에서는 얼굴과 온몸을 드러내며 기이한 퍼포먼스를 하고, 이로써 풍경과 쉽게 섞이길 거부하는 인물들이 등장했다. 〈새벽 물 주기〉(2018)에는 이른 새벽부터 공원에 나와 풀밭이 아닌 보도에 물을 주는 소녀가 있다. 그녀의 눈을 부릅뜨고 어둡게 굳어진 얼굴은, 허공에서 수수께끼 같은 행위를 하는 손들과 함께 기괴하고 수상한 느낌을 빚어낸다. 〈달 잡기〉(2019)는 한강에 비친 달빛을 손으로 건져 올리는 작가의 자화상이다. 그의 마법 같은 행위는 푸른 배경과 어우러져 환상적 분위기를 만들지만, 초점이 없는 눈과 기계적인 미소는 어딘가 스산한 느낌을 준다. 그러나 희미한 광기를 암시하는 이런 인물들은 풍경 속에서 유일한 주인공으로 군림하지 않는다. 나에게 이 작업들의 무대인 ‘식물 극장’은 제멋대로 무성히 자란 식물들로 가득한, 다소 삭막하고 무미건조한 일상적 공간으로 보인다. 작가가 수없이 많은 붓질을 쏟아부은 식물들은 인물보다 더 무겁고 완고한 모습으로 그곳을 점유하는 존재다. 〈달 잡기〉의 매혹적 분위기 속에서 식물과 인물은 비교적 평화롭게 공존한다. 그러나 기괴하고 수상한 〈새벽 물 주기〉에서, 그들은 각자의 자기주장으로 서로를 누르는 불협화음 속에서 이질적이고 심란한 풍경을 만들어 낸다.

   비현실적인, 그로테스크한 부분들에 주의를 기울이다 보면, 최모민의 회화는 일견 초현실주의적 성격을 갖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이 말을 그다지 달갑게 여기지 않으며, 실제로 초현실주의는 그의 회화를 적절히 특징짓는 개념이 될 수 없다. 그는 우연의 효과에 의존하는 기법을 쓰지도, 비이성적이고 무의식적인 공상의 세계를 그리지도 않는다. 이 작가의 회화는 오히려 그 바탕에 있는 리얼리즘을 선명히 드러낸다. 그는 직접 본 일상적 풍경의 사실적인 모습을 담는 작업 방식을 고수하며, 이런 풍경에 대한 애착이나 강박을 갖는 듯하다. 작가는 특히 불안정한 처지에 있는 오늘날의 청년의 삶을 그림에 담으려 해 왔다. 그의 작업들 속의 천변이나 골목, 공원은 그저 무의미한 일상적 장소가 아니다. 그것은 다른 사람들이 일하는 오후나 잠든 한밤중에 도시의 적막한 주변부를 하릴없이 배회하는 자들이 보는 유배지의 풍경이다. 그로테스크한 것들은 이런 현실을 희석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부각한다. 그렇다면 그의 회화는 초현실주의보다 카프카의 소설에 더 가깝다.

   카프카의 「변신」에서, 그레고르 잠자는 어느 날 아침에 갑충으로 변해서 깨어난다. 그리고 이런 악몽에도 불구하고, 그의 나머지 모든 세계는 지독히도 현실적이다. 외판원인 그는 벌레가 된 몸보다 출근 시간을 걱정하고, 집까지 찾아와 그의 직무 태만을 나무라는 지배인에게 아무도 알아듣지 못하는 소리로 항변한다. 가족에게는 그레고르의 처지보다 그가 돈을 벌어 오지 못하게 된 뒤로 먹고살 길이 더 심각한 문제이며, 그는 좁은 방에 갇혀 조용히 죽어 간다. 그의 진짜 악몽은 벌레가 되었다는 것보다, 오히려 그가 어딘가로 떠날 생각조차 못하게 만드는 이런 ‘현실’이다. 최모민이 그리는 일상적 풍경도 한 인간이 절망하든 몸부림을 치든 미동도 없이 그 자리에 존재하는 현실이다. 그러나 그의 회화와 카프카의 소설 사이에는 한 가지 간과할 수 없는 차이도 있다. 그레고르 잠자의 악몽은 어떤 희망도 없이 파국으로 가는 막다른 길이며, 가족들은 벌레가 죽자 비로소 안도해서 소풍을 가며 다시 찾아올 평범한 삶을 꿈꾼다. 반면, 최모민의 회화 속의 그로테스크는 그렇게 명백히 비극적이고 파국적인 상황을 빚지 않는다. 그것은 불길한 조짐인지 위안인지, 악몽인지 구원인지 분명하지 않다.

   다시 〈물세례〉로 눈을 돌리면, 불길한 꿈처럼 범람하는 강물은 두 사람에게 다가오는 파국을 암시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장면은 카프카의 출구 없는 비극적 악몽과는 다르다. 홍수에 물을 붓는 여자의 행위는, 오히려 불난 데 부채질하듯 파국을 과장하며 비극을 패러디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또한 남자의 몸에 쏟아지는 물은 어쩌면 그의 죄를 씻어 내는 구원의 의식인지도 모른다. 한편, 최모민의 회화는 〈풀밭 위의 식사〉(2019)가 보여 주듯이 희망에 더 가까운 환상을 담기도 한다. 이 그림에서 풀밭에 혼자 드러누운 남자는, 부서진 농구대밖에 없는 공원에서 빵과 소주로 된 험한 식사를 앞두고 있다. 그러나 그는 ‘제철의 남자’처럼 절망적인 모습은 아니다. 외려 사회의 밑바닥을 뒹굴면서도 꿈과 사랑을 포기하지 않는 어느 희극 영화의 주인공처럼, 이 남자는 해맑은 눈으로 하늘을 태평하게 바라보고 있다. 그리고 그 곁에 누워서 비과학적인 빛을 뿜는 농구대는 그의 이런 희극적 자유를 찬란하게 비춘다. 그러나 이 빛은 그를 둘러싼 황량한 현실에 비하면 보잘것없는 환상에 불과한 것이기도 하다.

   최모민의 회화는 일상적 삶의 사실주의적 풍경과, 그 속에 더해진 그로테스크한 환상을 담는다. 전자는 무겁고 견고하며, 후자는 엷고 의뭉스럽다. 그는 이로써 현실 세계의 반대편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무표정한 얼굴 뒤에 숨겨진 꿈을 드러낸다. 혹은, 그가 그리는 꿈은 현실적 풍경의 뼈를 벌리고 그 틈으로 조용히 파고든다(나는 이 작가의 꿈이 실존 인물의 삶이나 동시대의 더 다양한 풍속도를 파고들 때 발휘하게 될 힘을 기대한다). 그의 작업들 속의 그로테스크한 환상은 은밀한 악몽이나 구원을 암시하며, 그것들 둘은 많은 경우에 동전의 양면처럼 하나의 꿈을 이룬다. 무미건조한 것처럼 보이는 일상적 풍경에는 사실 누군가의 악몽이 깃들어 있다. 그리고 구원은 현실적 삶의 반대편이 아니라 그 깊숙한 곳에서 드러나는 꿈 속에서 악몽과 뒤섞여 희미하게 빛난다. 최모민은 꿈 같은 삶의 한 장면을 그린다.

 

황대원 (미학)

 

(각주)

흔히 그로테스크는 추하고 괴물 같은 형상과 동일시되곤 한다. 구글에서 ‘grotesque’로 이미지를 검색해 보면, 기형적 인물이나 흉측한 괴물의 이미지로 화면이 가득 채워지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미술과 문학에 나타난 그로테스크』(1957)에서, 볼프강 카이저는 그런 외형적 추함에 국한되지 않는 생경함, 섬뜩한 환상, 심연과 우스꽝스러움 등을 아우르는 그로테스크의 복잡한 의미를 밝힌다. 그것은 특정한 개별적 요소보다 한 작품의 구조와 문맥 속에서 표현되며, 단순한 공상이 아니라 생경하고 부조리한 모습으로 변화된 현실 세계의 특성이다. 볼프강 카이저 (이지혜 옮김, 2019), 『미술과 문학에 나타난 그로테스크』, 아모르문디, pp. 60, 92-93, 290-292. 또한 카이저는 카프카의 소설이 그리는, 어떤 충격도 없이 담담하게 인간을 악몽으로 몰아넣는 세계에서 ‘차가운’ 그로테스크를 읽어 내고, 그로테스크가 웃음과의 미묘한 관계 속에서 악마적 현실로부터의 해방과 이어질 수도 있음을 지적하기도 한다. 카이저 (2019), pp. 231-232, 294-295를 참조. 이런 시각에서 보면, 최모민의 회화는 비록 이 글이 주목하는 생경한 요소들을 엷고 은밀하게 담아낼 뿐이지만, 그럼에도 (또는 어쩌면 그렇기에) 추하고 기형적인 것을 부각하는 다른 작가들의 작업보다 그로테스크의 더 깊고 미묘한 곳을 건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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