갇히려는 자의 장르화, 회화

30대 중반 남성 화가 최모민의 작업은, 자신이 보기에는 더 이상 ‘힘’을 갖지 못하는 매체/ 형식인 회화를 그럼에도 계속 한다는 것, 지금 자신이 하는 ‘이’ 회화에 대한 것이다. 자기- 지시적 회화인 듯 하다. 그는 일은 낮에 하고 작업은 “밤과 새벽에” 한다. 배경은 그가 살고 산책하고 관찰하고 사진으로 담고 작업실에서 재구성하는 “연희동 홍제천 부근 저개발 지역 이전에는 할머니 집이었던 작업실 주변 혹은 홍제천 산책로 밤풍경”이다. 동네 풍경은 그가 말한 것처럼 “개와 늑대의 시간”에 맞춰져 언캐니하게 (재)구성된다. 개와 늑대가 분간이 안 되는, 낮에서 밤으로, 밤에서 새벽으로 넘어가는 어스름한 시간에 사물과 풍경은 재현성을 상실하고 대신에 모호하고 혼성적인 것으로, 불길하고 불안한 것으로 전치된다. 보고 판단하 는 자의 시선이 불가능한 시간은 사물과 풍경이 비로소 말하는 시간이다. 작가는 자신의 경 제적 물리적 조건이 제안한 시간, 이런 풍경에 자신을 맡긴다. 그런 시간에 갇혔다. 그가 선 택한 것이 아닌 그에게 남은 시간을 살아낼 뿐이다. 할머니 집이 있는 동네, 그가 화가로서 깃든 시간이 그렇다. 그 시간에 그는 사물과 풍경의 일부가 되거나 그것들의 응시에 노출된 다. 박탈, 종속, 충실.

따라서 작가가 자신의 회화는 “현대 미술”이나 “진보적 언어”가 아니라 “장르”일 뿐이라 고 조용히 말할 때, 유일무이한 예술이나 보편적 언어로서의 회화가 아닌, 이제 더는 할 것 도 없을 만큼 박제화되고 제도화되고 일종의 ‘키치’가 된 회화가 자신에게 도착한 지금의 형 식이라고 말할 때, 우리는 대신에 껍데기로 남아 바스락거리는 회화의 ‘잔여’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그를 통해 보아야 한다. 그는 자신의 회화-하기의 하찮음을 인정한다. 그는 좀 더 래디칼하고 진보적인 언어로 갈아타지 않았고, 자신의 낡은 매체의 불리함을 인정했고, 그러므로 저개발 지역 풍경과 하나의 장르화로서의 회화와 머무르기를 선택했다―이것은 선 택인가. 도시에 남은 풍경은 자연이라 부르기 뭐한 사물이다. 남은 것이고 도시의 타자가 아 닌 도시의 일부이고, 그러면서도 자연인 모호한 것이다. 홍제천 부근이 이미 그 자체 언캐니 한 장소일지 모른다. 밀려나고 잔존하고 보유하고 모호한. 그런 여전히 남아 있는 장소와 여 전히 작동하는 형식을 결합하는 퍼포먼스/수행은 가치와 의미에서 거의 소진된 내부, 텅 빈 내부로서의 장소와 형식의 접합이라는 점에서 밋밋한 무위(無爲)이다. 행하지만 행함이 없는 이런 수행은 굳이 예술이라는 매체의 한계를 빼고 보면 그 자체 ‘미적’이다. 벗겨진 후광이 나 잊혀진 이름 너머에서야 비로소 일어나는 수행들을 우리는 그렇게 부른다.

자신에게 주어진 조건이나 한계를 극복하기 보다는 그것을 무위의 반복으로 재전유하는 것, 남은 자에게 주어진 유희에의 명령에 충실하는 것은 결국 내부가 비워지고 말라버린 껍 질처럼 바스락거리는 형식에서 길어 올릴 어떤 은유, 상징을 찾으려는 필사적인 노력일 것 이다. 말라버린 늪에하염 없이 낚싯대를 드리우는 자는 늘있었고1) 그들은그렇게텅빈제 스쳐에 자신을 묶음으로써 삶을 거대한 하나의 은유와 교환했다. 그런 하기, 살기, 겪기, 남 기.

이번 전시에 작가는 <늪에서> 연작과 <매달리다> 연작을 내놓았다. 작품 제목은 모두 동사적 상태를 함축한다. 화면에 늪이라고 보기에는 다소 작고 얕은 장소가 등장한다. 화면 의 중앙에 배치된 늪(포식자의 은유?)은 빠뜨리고 허우적거리게 하고 빨아들이는 늪의 은유 에 다소 못미친다. 비가 와서 움푹하니 패인 곳에 고인 물 같은 이 늪과 늘 작가의 화면에 등장하는 풍경 사이에서 동일인물인 듯 한 둘, 셋의 사내가 옷을 벗고 있거나 늪을 응시하 거나 이쪽을 바라본다. 재현적 서사의 이해불가능성은 그들이 몸소 자처해서 그 안으로 들 어가려고 하고 있다는 데 있다. 그들은 순차적 시간의 절단면들처럼 배치되어 있다. 이미 늪 에 빠진 이, 이쪽으로 등을 보이고 마저 옷을 벗고 있는 이, 막 상의를 벗기 시작한 이, 늪 에 슬쩍 배치된 나무 의자. 물 웅덩이 속 자신을 가만히 들여다보는 인물과 웅덩이 속 이미 지의 시선은 살짝 어긋나 있다.(<늪에서> 연작 중 7) 그들은 자기반영적이지 않다. ‘거울상’ 은 늪 바깥의 자신이 아닌 이쪽을 바라보고 있다. 배경의 숲을 반복하는 녹색 옷을 입은, 그 러므로 식물의 확장이자 일부인 이 남자는 우물일 수 없는 ‘늪’에 자신을 비춰보고 있다. 그 림 속 ‘얼굴’은 살아있는 인격이라기보다는 그림자-반영에 가깝다. 그는 유령-환영-이미지 같 다. 자동적으로 우리는 늪을 중심으로 한 세 사람의 행위의 시간적 순서를 ‘발견’하려고 할 것이지만 불가능하다. 다른 화면에서는 이제 손에 녹색을 묻힌/손이 녹색인 남자는 늪에 들 어간 채 이곳을 보고 이전 화면보다 시간상으로 더 나가 있다(<늪에서> 연작 중 6>. 슬쩍 보이는 ‘얼굴’은 표정이 없다. 그들은 이곳에 들어가야/빠져야 한다는 데 동의했거나 복종하 는 것 같다―풍경은 이 불가해한 상황에 목격자인가, 방관자인가? 그(들)은 자살인지 박해인 지 명령인지 ‘행위’인지 동의인지 사라짐인지 모를 ‘그것’을 하고 있다. “개와 늑대의 시간”에 벌어지는 일이고 우리는 그 시간 밖에서 화면 속 상황을 ‘보는’ 일을 강요당하고 결국 실패 한다. 작가는 역방향으로 움직이면서 그 모든 것들이 공존하는 어떤 상황으로 ‘들어가려는/ 들어가야 하는’ 자이다. 왜 세 여성은 두 손을 모으고 조용히 누워 있는 다른 여성을 내려다 보며 뭔가를 하고 있는가?(<늪에서> 연작 중 8> 이 단면은 어떤 이야기의 파편이고 알레고 리인가? 어떤 이야기에도 맞춰지지 않는 파편을 나도 몇 개는 갖고 이승을 통과하고 있는 중이기는 하다. 그것은 실재인가, 환영인가, 누가 내게 묻힌 얼룩인가? 꿈 같다. 꿈은 내가 꾼 것인지 누가 나대신 꾼 것인지 모른다고도 한다. 꿈은 그런 발신자와 수신자의 분리불가 능함을 전제로, 나를 학대하고 나를 매혹한다. 꿈은 나이를 모르고 장소를 모르고 어디서건 나를 착취하면서 계속 한다.

<매달리다> 연작 중 역시 상의를 벗고 이쪽으로 등을 보이면서 ‘매달린’ 인물(연작 중 8) 은 상징적으로 딛고 있는 아파트와 알레고리적으로 붙들고 있는 나뭇가지 사이에서 ‘균형’을 잡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보인 것을 잘못 읽는 것, 혹은 그려진 것을 잘못 보는 것은 작가와 관객 모두의 ‘운명’이다. 읽을 수 없는, 읽기를 거부하는 화면 앞에서 우리는 계속 이 런저런 읽기를 시도하고 있게 된다. 저개발 지역에 사는 30대의 남성이 한국을 지배하는 대 타자인바 아파트를 인용할 수야 있겠지만, 여기서 아파트는 단지 그의 ‘풍경’ 속 밋밋하고 시시한 이미지 중 하나에 불과하다. 그는 운동을 하는 것인지 떨어지려는 것인지 매달리려 는 것인지 알 수 없는 움직임을 제시한다. 캔버스에 유화로 옮기기 전 수없이 습작, 연습을 거치는 작가의 거친 붓질은 이번 작업에서도 전 화면을 지배한다. 슥슥 그려진 겨울 나무들 과 역시나 꿈처럼 여기저기에 흔적으로 배치된 사내의 발들은 이곳이 논리적 공간이 아니라 는 것을 암시한다. 빠질 수 없는 늪처럼 매달릴 수 없는 나뭇가지를 붙드는 사내의 이 무익 하고 무의미한 행위는 그렇기에 오직 그려졌다는 행위성을 통해서 존립한다. 비슷한 구조의

거미줄을 디딤돌/줄 삼아 균형을 유지하는 인물의 상황도 모호하다(<매달리다> 연작 중 7). 그는 거대한 거미줄에 갇힌 것인지 그 거미줄을 의지처 삼아 ‘건너려는/넘어가려는’ 것인지 식별불가능하다. 이러한 모호성이 작가의 ‘일관된’ 화면, 풍경, 구성이다. 5개의 탁구채는 떨 어지는 순간들의 시간적 단면들인 듯 연쇄를 이루고, 4개의 탁구공과 한 개의 반숙 계란 프 라이가 왼쪽 면을 차지한 겨울 풍경 속 매달린 남자와 그를 돕는 남자는 역시 다른 화면들 처럼 동일인물일 것 같다(연작 중 6). 5개의 탁구채는 비논리적이고, 심지어 슬그머니 동석 한 계란 프라이는 농담 같다.

오직 나무에 매달리다, 늪으로 들어간다라는 동사적 행위만이 제시되는 이런 텅 빈 행위 앞에서 우리는 계속 논리적 (불)가능성과 심리적 긴장을 겪게 된다. 보이는 것은 행위이거나 단지 몇 개의 붓질이거나 (시간적)서사를 무화하려는 신중한 구성이다. 다시 말하지만 이것 은 남은 회화에 대한 것이다.

양효실/ 미학자

1) 박상륭의 소설 『죽음의 한 연구』를 읽은 뒤 내게 들러붙은 은유이다.

최모민 - 꿈같은 삶 Life is but a dream

 

중력이 끌어당기는 단단한 지면, 원근의 관계가 오차 없이 계산된 공간, 그리고 뒤틀림 없이 흐르는 시간은 편안한 일상의 삶을 지탱한다. 시각의 중심으로서 흔들림 없는 주체라던가 진보를 향해 흐르는 선형적인 시간과 같은 보편적인 전제로부터, 일찍 일어나는 새가 굶지 않는다는 소소하지만 굳건한 믿음까지; 세상을 예측 가능하게 하는 시스템이 의심의 여지 없이 안정적으로 작동하는, 우리가 믿는 그대로 보이는 현실 말이다. 전제가 정교해질 수록, 믿음이 보편화 될수록 시스템의 질서는 매끈하게 구멍 없는 현실로 표상된다. 반자동화된 일상이 미래의 가능성을 몇 가지 예측 가능한 패턴으로 환원시킨 덕분에, 그 안에 주어진 길을 따라 흐르는 우리는 매 순간 갈림길에서 경우의 수를 계산하거나 눈 앞에 펼쳐진 선택지들 앞에서 요행에 운명을 던져야만 하는 불안으로부터 해방된 듯하다.

 

그러므로 시점이 미묘하게 흔들리거나 공간감이 미세하게 깨지는 화면, 시간이 버퍼링하듯 같은 장면이 반복되었다거나 하나의 시공간에서 같은 대상이 여럿 목격 되었다는 괴담들은 절대적인 시스템에는 있을 수 없는 오류로서 막연한 불안감을 불러일으킨다. 예측할 수 있는 현상으로 계산되지 않은 것들 (인과관계로 특정되지 않는 징후들, 글리치, 그리고 재난), 그러니까 가능의 영역 밖에서 이야기되지 않던 것들이 순간 눈앞에 드러날 때 일상은 불길하게 파열된다. 노동과 소비의 패러다임 속에서 태만과 방황 또한 비일상적인 것으로서 흉하다. 소속 없이 도시를 떠도는 이들은 모자이크 처리되고, 산책자의 시선은 번역될 수 없는 이방인의 소음으로 분류된다. 그래서 곳곳의 허공에 나타나 커터칼로 나무를 깍거나 연필로 나뭇잎에 끄적이는 몸 없는 손들, 공터에 드러누운 동시에 서 있는 한 사람, 강물에 비친 달그림자를 건져 올리는 사람이 있는 최모민의 풍경은 일상의 흐름을 흐트러뜨리며 불안한 징조를 울린다.

 

작업실과 집을 오가는 작가의 일과 속에서, 목적지를 향하는 경로상의 익숙한 장소들은 행위의 의미를 파악하기 어려운 무목적적 행위들이 흩뿌려진 낯선 풍경으로 그려진다. 그가 그린 일상적 풍경 속에 일상의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한 방향으로 흐르는 선형적인 시간과 예측 가능한 인과관계는 정지되었다. 개연성 없는 사건을 구성하는 인물, 식물, 사물들은 익숙한 도시의 풍경과 미묘한 부조화를 이루며 일상으로부터 살짝 미끄러진 생경한 장면을 이룬다. 강물 속 돌이 되어버린 남자, 눈더미를 뒤집어쓴 채 눈밭에 숨어 있는 사람, 쓸데없이 보도블록에 물을 주는 사람은 일상의 속도를 기묘하게 정지시킨다. 화면 안에 그려지는 인물과 사물들은 사건을 이루는 대신 장소에 놓인 다른 것들과 함께 풍경을 이루고 있을 뿐이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그의 풍경에는 역설적으로 (무슨 일이 곧 터져도 이상하지 않을 듯이) 모든 가능성으로 포화된 공기가 무겁게 깔려 있었다. 어떤 사건에 대한 징후로 특정될 수 없는 장면들은 아직 가능과 비가능으로 범주화되지 않은 모든 잠재들이 혼란스럽게 뒤섞인 비일상의 풍경을 이룬다.

 

새의 시체, 깨진 컵, 과일, 꽃 등 바니타스의 도상과 세례 의식, 허공에서 쏟아지는 광선과 같은 종교화의 도상이 눈에 띄게 화면 위에 드러나는 최근의 신작들도 크게 다르게 느껴지지 않는다. 도식화된 시각적 기호들은 도시의 익숙한 풍경 속에 개연성 없이 삽입되어 있다. 맥락과 무관하게 의미로 박제되어버린 대상과 행위들의 시간은 아무런 사건도 일어나지 않던 시간 만큼이나 중력 없이 풍경 속에 떠 있다. 무심하게 덧붙여진 이종의 이미지들은 일상적 공간감을 미묘하게 틀어버린다. 세상의 무상함과 존재의 유한함을 이야기하는 알레고리는 초월적인 구조의 무한함을 경이롭게 강조하는 장치였지만, 일상적 질서가 미묘하게 어긋난 풍경 안에서 이들은 도리어 완벽하지 않은 시스템이 작동 정지되는 오류의 순간을 허옇게 드러내고 만다.

 

눈 뜨고 집 밖으로 나가 일터로 왕복하는 일과 속에서 눈앞에 보이는 형태, 몸짓, 그리고 관계들은 사실 효용성이라는 현실의 어떤 질서, 공동의 믿음 외에는 아무런 개연성 없이 병치되어 있을 뿐이다. 당연하게 일상을 이루는 것들이 당연하게 일상에서 탈락한 수많은 형태와 이름들보다 더 견고하진 않은 것 같다. 일상적으로 반복되는 익숙한 사건들이 생경한 해프닝보다 더 필연적일 것도 없어 보인다. 눈앞의 현실로서 보여지는 것들은 우리가 믿고 있는 시스템이 드러낸 하나의 선택된 가능성일 뿐이지 않은가. 최모민이 그리는 개연성 없는 관계들과 생경한 해프닝의 꿈 같은 이미지는 삶의 대안으로, 또는 피안으로 현실의 경계 바깥에서 반짝이는 허구나 이상은 아닐 것이다. 그것은 차라리 우리가 현실이라 공고하게 믿는 어떤 시스템이 드러내는 한 가능성 밑에 은폐된 잠재들처럼 가까이에서 불길하게 꿈틀댄다. 그러니까 <꿈 같은 삶 Life is but a dream>이란 우리가 일상이라 믿는 환영의 균열된 틈 사이로 순간순간 드러나는 비일상의 카오스, 특정할 수 없는 파국의 징후들이 곳곳에 잠재해 있는 익숙한 구조의 불확실한 이면일 것이다.

 

 

아웃사이트 큐레이터 임진호

꿈 같은 삶: 최모민의 회화 속의 은밀한 악몽과 구원

 

 

   어둠이 내린 한강을 건너는 이 다리는 아직 공사 중이라 불그스름한 철골을 드러내고 있다. 비단 물리적 의미뿐 아니라 사회적 의미에서도, 최모민의 〈물세례〉(2019)의 배경을 뒤덮는 구조물은 거대한 무게를 암시한다. 그것은 평범한 개인의 관점에서 보면 엄청난 자본의 산물이며, 완성되고 나면 수많은 시민들의 삶을 떠받칠 것이다. 강 건너편에 펼쳐진 도시의 풍경은 작은 불빛들 하나하나마다 누군가의 삶을 담는다. 교량이 되어 가는 이 구조물은 많은 선들이 교차하는 철골처럼 복잡하고 견고한 현실의 일부다. 그러나 다른 한편, 그 아래에서 바라보이는 한강의 풍경은 비현실적이고 환상적이다. 다리의 붉은 뼈가 드러난 모습은 아이러니하게도 폐허를 닮았으며, 검푸른 하늘 아래에서 불빛으로 가득한 도시와 어우러져 기이한 정감을 빚어낸다. 그리고 비도 오지 않는데 강물이 범람하고 있다. 불길한 꿈처럼, 물은 강변에 있는 지극히 평범한 옷차림의 두 사람을 발목부터 천천히 삼키며 차오른다. 서 있는 여자가 앉아 있는 남자에게 기울인 생수병에서는 물리 법칙으로 설명할 수 없는 양의 물이 쏟아진다. 그녀가 이로써 그를 모욕하는지 정화하는지, 그들의 행위가 파국을 부추기는 것인지 물리치는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작가는 지난 수년간 현실과 비현실이 교차하는 이런 풍경을 파고들어 왔다.

   최모민의 첫 번째 개인전의 제목은 《익명의 풍경》(2017)이었고, 이 말은 그가 2015년에 그린 〈익명의 밤〉 연작에서 비롯되었다. 그의 작업실이 있었던 홍제천 부근의 밤을 그린 이 연작은, 천변 길이나 주택가 골목에서 짙은 어둠과 가로등 불빛이 부드럽게 섞이는, 인적 없는 적막한 풍경을 담는다. 그것은 불면을 피해 모두가 잠든 한밤중에 산책을 다녀 본 사람에게는 익숙한 장면이다. 한편으로, 어둠이 흔히 자아내는 두렵고 불안한 정서는 불면증을 유발하는 고민들로 가득한 막막한 앞길과 잘 어울린다. 다른 한편, 깊이 잠든 도시를 걸으면 꿈속을 헤매는 기분이 들고, 고독한 어둠은 나의 정체성을 서서히 지우면서 휴식과 위안을 준다. 작가는 이런 풍경을 가리켜 ‘익명’의 밤이라고 불렀다. 밤은 빈부 격차도 골목의 쓰레기도 어둠 속으로 가라앉히고, 사회가 정한 정체성을 잠재우며 모든 사람과 사물들을 평등한 익명의 존재로 만든다.

   그는 〈익명의 밤〉 이후 사회적, 일상적 공간(에 속하는 존재들)을 잠시나마 낯선 모습으로 변화시키는 다른 현상들로 눈을 돌린다. 가령, 〈제철의 남자 2〉(2018)는 하얀 눈으로 덮이고 늦은 오후의 태양에 금빛으로 물드는 풍경을 담는다. 〈생각하며 걷기〉(2019)의 시간적 배경은 ‘개와 늑대 사이’(entre chien et loup)라는 말이 떠오르는 황혼 녘이다. 그리고 시간대를 특정하기 어려운 다른 많은 작업에서도, 그는 선득한 공기, 창백한 빛, 푸르스름한 어둠과 같은 것들이 있는 장면을 능숙한 붓질로 표현한다. 최모민의 회화의 한 가지 특징은 이런 요소들에 의해 현실적 풍경에 은은히 더해지는 환상적 분위기다. 그것은 깊은 밤이나 개와 늑대 사이의 시간처럼, 미묘한 매력을 가지면서도 어딘가 차갑고 수상한 느낌을 머금는다.

   그의 회화가 갖는 다른 하나의 특징은 인물의 기이한 모습이다. 나는 그것을 두드러지게 보여 주는 〈돌이 된 남자 2〉(2017)라는 작업에 주목한다. 이 작업은 냇물 속(아마 홍제천일 것이다)에 박힌 큰 돌덩이와, 그 앞에서 생경하고 작위적인 모습으로 솟은 정체 모를 남자의 한쪽 다리를 보여 준다. 이것은 외견상 거칠고 무미건조한 그림이며, 최모민의 다른 작업들의 맥락 속에서 바라보지 않으면 영문을 알기 힘든 장면이다. 작가는 이 남자의 행위를 ‘위장술’이라고 부른다. 〈돌이 된 남자 2〉의 배경은 돌과 잡초밖에 없는 벌건 대낮의 천변이다. 그곳에는 초라한 현실을 가릴 수 있는 어떤 환상적인 요소도 없다. 그는 이런 ‘절박한’ 상황에서 자기 모습을 숨기려고 냇물 속에 드러눕는 극단적 선택을 한 것이다. 이 ‘슬랩스틱’은 우스꽝스러운 행위지만, 정말 우습기보다는 오히려 처연하다. 그의 경직된 다리는 익사한 시체처럼 보여 불길하기도 하지만, 이 ‘익명’의 남자는 물속에서 안도감을 느끼고 있는지도 모른다. 최모민이 그리는 풍경은 이런 인물(의 제스처)로 인해 비현실적 성격을 갖기도 한다.

   〈제철의 남자 2〉는 이런 두 가지 특징을 모두 선명히 드러내고 결합하며 그의 회화적 탐구를 한차례 매듭짓는 작업이다. 이 그림 속의 남자는 하얀 눈에 뒤덮여 있다. 아무도 없는 오후의 천변에 있는 그는 아마 직업이 없을 것이며,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주저앉은 모습을 보면 희망도 없을 것이다. 그는 눈이 상징하는 냉혹한 고통을 겪고 있거나, 혹은 절망에 빠져 기괴한 방식으로 자학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겨울에 반팔을 입고 눈을 뒤집어쓴 이 ‘제철’의 남자의 과장스런 제스처는 우스꽝스럽게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또 다르게 보면, 이 남자는 그를 덮어 주는 눈 속에 숨어서 위안을 받는 것 같고, 늦은 오후의 태양 아래에서 그의 고행은 주위의 적막한 풍경과 함께 환상적인 빛으로 물든다. 이 그림은 가만히 보면 기괴하고, 우스꽝스럽고, 환상적이다. 이런 느낌을 한 마디로 표현하려 하면, 전반적으로 평범한 사물과 풍경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이 작업의 인상을 고려할 때 다소 뜻밖인 말이 떠오른다. 즉, 작가는 ‘그로테스크’한 것들이 은밀히 녹아든 일상적 풍경을 그린다.(각주)

  0 세 번째 개인전 《식물 극장》(2019)에서 발표된 최근의 작업들에서, 그는 식물이 있는 풍경을 무대로 수행되는 ‘일인극’(그러나 구체적인 사건은 없다)을 보여 준다. 이전의 작업들 속의 얼굴 없는 인물이 풍경에 녹아드는 하나의 제스처나 실루엣에 머물렀던 것과 달리, 《식물 극장》에서는 얼굴과 온몸을 드러내며 기이한 퍼포먼스를 하고, 이로써 풍경과 쉽게 섞이길 거부하는 인물들이 등장했다. 〈새벽 물 주기〉(2018)에는 이른 새벽부터 공원에 나와 풀밭이 아닌 보도에 물을 주는 소녀가 있다. 그녀의 눈을 부릅뜨고 어둡게 굳어진 얼굴은, 허공에서 수수께끼 같은 행위를 하는 손들과 함께 기괴하고 수상한 느낌을 빚어낸다. 〈달 잡기〉(2019)는 한강에 비친 달빛을 손으로 건져 올리는 작가의 자화상이다. 그의 마법 같은 행위는 푸른 배경과 어우러져 환상적 분위기를 만들지만, 초점이 없는 눈과 기계적인 미소는 어딘가 스산한 느낌을 준다. 그러나 희미한 광기를 암시하는 이런 인물들은 풍경 속에서 유일한 주인공으로 군림하지 않는다. 나에게 이 작업들의 무대인 ‘식물 극장’은 제멋대로 무성히 자란 식물들로 가득한, 다소 삭막하고 무미건조한 일상적 공간으로 보인다. 작가가 수없이 많은 붓질을 쏟아부은 식물들은 인물보다 더 무겁고 완고한 모습으로 그곳을 점유하는 존재다. 〈달 잡기〉의 매혹적 분위기 속에서 식물과 인물은 비교적 평화롭게 공존한다. 그러나 기괴하고 수상한 〈새벽 물 주기〉에서, 그들은 각자의 자기주장으로 서로를 누르는 불협화음 속에서 이질적이고 심란한 풍경을 만들어 낸다.

   비현실적인, 그로테스크한 부분들에 주의를 기울이다 보면, 최모민의 회화는 일견 초현실주의적 성격을 갖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이 말을 그다지 달갑게 여기지 않으며, 실제로 초현실주의는 그의 회화를 적절히 특징짓는 개념이 될 수 없다. 그는 우연의 효과에 의존하는 기법을 쓰지도, 비이성적이고 무의식적인 공상의 세계를 그리지도 않는다. 이 작가의 회화는 오히려 그 바탕에 있는 리얼리즘을 선명히 드러낸다. 그는 직접 본 일상적 풍경의 사실적인 모습을 담는 작업 방식을 고수하며, 이런 풍경에 대한 애착이나 강박을 갖는 듯하다. 작가는 특히 불안정한 처지에 있는 오늘날의 청년의 삶을 그림에 담으려 해 왔다. 그의 작업들 속의 천변이나 골목, 공원은 그저 무의미한 일상적 장소가 아니다. 그것은 다른 사람들이 일하는 오후나 잠든 한밤중에 도시의 적막한 주변부를 하릴없이 배회하는 자들이 보는 유배지의 풍경이다. 그로테스크한 것들은 이런 현실을 희석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부각한다. 그렇다면 그의 회화는 초현실주의보다 카프카의 소설에 더 가깝다.

   카프카의 「변신」에서, 그레고르 잠자는 어느 날 아침에 갑충으로 변해서 깨어난다. 그리고 이런 악몽에도 불구하고, 그의 나머지 모든 세계는 지독히도 현실적이다. 외판원인 그는 벌레가 된 몸보다 출근 시간을 걱정하고, 집까지 찾아와 그의 직무 태만을 나무라는 지배인에게 아무도 알아듣지 못하는 소리로 항변한다. 가족에게는 그레고르의 처지보다 그가 돈을 벌어 오지 못하게 된 뒤로 먹고살 길이 더 심각한 문제이며, 그는 좁은 방에 갇혀 조용히 죽어 간다. 그의 진짜 악몽은 벌레가 되었다는 것보다, 오히려 그가 어딘가로 떠날 생각조차 못하게 만드는 이런 ‘현실’이다. 최모민이 그리는 일상적 풍경도 한 인간이 절망하든 몸부림을 치든 미동도 없이 그 자리에 존재하는 현실이다. 그러나 그의 회화와 카프카의 소설 사이에는 한 가지 간과할 수 없는 차이도 있다. 그레고르 잠자의 악몽은 어떤 희망도 없이 파국으로 가는 막다른 길이며, 가족들은 벌레가 죽자 비로소 안도해서 소풍을 가며 다시 찾아올 평범한 삶을 꿈꾼다. 반면, 최모민의 회화 속의 그로테스크는 그렇게 명백히 비극적이고 파국적인 상황을 빚지 않는다. 그것은 불길한 조짐인지 위안인지, 악몽인지 구원인지 분명하지 않다.

   다시 〈물세례〉로 눈을 돌리면, 불길한 꿈처럼 범람하는 강물은 두 사람에게 다가오는 파국을 암시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장면은 카프카의 출구 없는 비극적 악몽과는 다르다. 홍수에 물을 붓는 여자의 행위는, 오히려 불난 데 부채질하듯 파국을 과장하며 비극을 패러디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또한 남자의 몸에 쏟아지는 물은 어쩌면 그의 죄를 씻어 내는 구원의 의식인지도 모른다. 한편, 최모민의 회화는 〈풀밭 위의 식사〉(2019)가 보여 주듯이 희망에 더 가까운 환상을 담기도 한다. 이 그림에서 풀밭에 혼자 드러누운 남자는, 부서진 농구대밖에 없는 공원에서 빵과 소주로 된 험한 식사를 앞두고 있다. 그러나 그는 ‘제철의 남자’처럼 절망적인 모습은 아니다. 외려 사회의 밑바닥을 뒹굴면서도 꿈과 사랑을 포기하지 않는 어느 희극 영화의 주인공처럼, 이 남자는 해맑은 눈으로 하늘을 태평하게 바라보고 있다. 그리고 그 곁에 누워서 비과학적인 빛을 뿜는 농구대는 그의 이런 희극적 자유를 찬란하게 비춘다. 그러나 이 빛은 그를 둘러싼 황량한 현실에 비하면 보잘것없는 환상에 불과한 것이기도 하다.

   최모민의 회화는 일상적 삶의 사실주의적 풍경과, 그 속에 더해진 그로테스크한 환상을 담는다. 전자는 무겁고 견고하며, 후자는 엷고 의뭉스럽다. 그는 이로써 현실 세계의 반대편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무표정한 얼굴 뒤에 숨겨진 꿈을 드러낸다. 혹은, 그가 그리는 꿈은 현실적 풍경의 뼈를 벌리고 그 틈으로 조용히 파고든다(나는 이 작가의 꿈이 실존 인물의 삶이나 동시대의 더 다양한 풍속도를 파고들 때 발휘하게 될 힘을 기대한다). 그의 작업들 속의 그로테스크한 환상은 은밀한 악몽이나 구원을 암시하며, 그것들 둘은 많은 경우에 동전의 양면처럼 하나의 꿈을 이룬다. 무미건조한 것처럼 보이는 일상적 풍경에는 사실 누군가의 악몽이 깃들어 있다. 그리고 구원은 현실적 삶의 반대편이 아니라 그 깊숙한 곳에서 드러나는 꿈 속에서 악몽과 뒤섞여 희미하게 빛난다. 최모민은 꿈 같은 삶의 한 장면을 그린다.

 

황대원 (미학)

 

(각주)

흔히 그로테스크는 추하고 괴물 같은 형상과 동일시되곤 한다. 구글에서 ‘grotesque’로 이미지를 검색해 보면, 기형적 인물이나 흉측한 괴물의 이미지로 화면이 가득 채워지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미술과 문학에 나타난 그로테스크』(1957)에서, 볼프강 카이저는 그런 외형적 추함에 국한되지 않는 생경함, 섬뜩한 환상, 심연과 우스꽝스러움 등을 아우르는 그로테스크의 복잡한 의미를 밝힌다. 그것은 특정한 개별적 요소보다 한 작품의 구조와 문맥 속에서 표현되며, 단순한 공상이 아니라 생경하고 부조리한 모습으로 변화된 현실 세계의 특성이다. 볼프강 카이저 (이지혜 옮김, 2019), 『미술과 문학에 나타난 그로테스크』, 아모르문디, pp. 60, 92-93, 290-292. 또한 카이저는 카프카의 소설이 그리는, 어떤 충격도 없이 담담하게 인간을 악몽으로 몰아넣는 세계에서 ‘차가운’ 그로테스크를 읽어 내고, 그로테스크가 웃음과의 미묘한 관계 속에서 악마적 현실로부터의 해방과 이어질 수도 있음을 지적하기도 한다. 카이저 (2019), pp. 231-232, 294-295를 참조. 이런 시각에서 보면, 최모민의 회화는 비록 이 글이 주목하는 생경한 요소들을 엷고 은밀하게 담아낼 뿐이지만, 그럼에도 (또는 어쩌면 그렇기에) 추하고 기형적인 것을 부각하는 다른 작가들의 작업보다 그로테스크의 더 깊고 미묘한 곳을 건드린다.